여행자도 현지인도 아닌 삶: 베트남에서의 지독한 고립감

[동남아 자전거 여행] #44 베트남 2025.02.22 - 23 판티엣과 무이네를 지나며 북상하는 길. 나를 가로막는 맞바람과 고립감

여행자도 현지인도 아닌 삶: 베트남에서의 지독한 고립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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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2

베트남은 10월~4월 즈음 북동풍이 분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북동풍이 우리나라를 거쳐서 베트남에 도착하는 거 같은데, 그래서 이 시기 우리나라의 날씨와 베트남 날씨는 2-3일 차이를 두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는 듯 하다. 요지는 이게 아니고 북동풍이 분다는 건 여기서 하노이로 가는 한달 내내 역풍을 맞고 가야한다는 뜻이다.

​오늘 바람은 꽤나 강하다. 일기예보를 보니 앞으로 며칠간 비를 동반한 바람이 계속 분다. 그래도 오늘 풍경은 요근래 본 풍경 중 가장 멋졌다. 판티엣을 지나 그 옆에 유명한 관광지 무이네도 지났다. 왜 이렇게 관광버스가 많고 음식점과 호텔이 많을까 달릴 때는 몰랐는데 이날 저녁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나서야 이곳이 무이네라는 유명한 관광지라는 걸 알았다.

태국과 라오스는 여행자 인프라가 촘촘히 발달되어 있어서 혼자 여행을 와도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있고 놀 데도 많다. 반면에 베트남은 가족 단위, 친구 단위의 여행자에게 편리하도록 여행 인프라가 형성 되어 있어서 혼자서 유명한 관광지를 여행하는게 힘들다. 외롭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런 유명 관광지를 지날 때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씁쓸한 맛이 있다.

코뭇으로 경로를 짰는데 또 이상한 길로 들어갔다. 분명 포장도로로 안내하라고 설정을 해놨는데 비포장 도로에 심지어 모래사장이 깔린 곳으로도 갔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골은 웬만해선 갈 일이 없는데 말이다. 파도가 강한 바다 옆길이라 멋지긴 한데 너무 힘들다. 다음부턴 경로 설정을 좀 더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오늘 또 했다.


2025.02.23

다음날, 비를 동반한 강한 바람이 예보되어있어 이 곳에 하루 쉬고 가기로 했다. 1,100원에 자전거 세차를 꼼꼼히 하고 근처 카페로 가서 시간을 때웠다. 블로그 쓰기, 영어공부, 책읽기, 이 세개가 내가 자전거를 타지 않고 쉴 때 주로 하는 것들이다. 여행한지 4개월이 다 되어가서인지 베트남의 국가적 특성인지 슬슬 이 생활이 지루해지고, 무엇보다 외롭다는 느낌이 많이 든다. 뉴질랜드, 태국 등지에서는 비슷한 여행자들도 가끔 만나고 친절한 현지인들, 비슷한 처지의 여행자들과 얘기하고 때론 같이 여행도 하면서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지금은 예전과 다르다.

베트남이라는 나라적 특성이 나를 외롭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혼자 여행한지 오래되어서 외로움을 타는 건지 아직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 뉴질랜드에서 방콕으로 가지 않고 베트남으로 넘어와서 동남아 여행 경로를 반대로 잡았다면 태국에서 외로움을 느꼈을까?

어쨌건 확실한건 베트남으로 넘어오면서 내 외모에 대한 자의식이 깨어났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자의식이 내 외로움과 상관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 이 전까지는 머리카락이 길든,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수염이 났든말든, 키가 작든, 이런 내 신체적 특성에 대한 의식을 거의 하지 못한 채 여행했다. 서양 문화권이 원래 외모 집착이 동양권보다 덜한데, 거기에 뉴질랜드 같이 백인, 마오리족, 동양인이 다 같이 어울어져 사는 곳에서는 이러한 특성이 극대화된다.(그래서 뉴질랜드에서 제일 오래 수염을 깎지 않았다. 며칠 동안 거울 한 번 안본 적도 많다.) 동질한 집단일수록 작은 차이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법이다. 태국 또한 워낙 옛날부터 서양인들이 원래 많았고 워낙 다양성이 큰 사회라 여행하면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다.

베트남은 이곳 네 나라 중 가장 한국과 문화적, 경제적, 외모적으로 가까운 나라고 거기에 나는 한국인들 중에서도 베트남인에 가까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많이 이질적인 사람에게는 내부인끼리의 사회적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우리나라에 사는 서양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은 우리나라 사람들 간에 서로 들이대는 기준과 확연히 다르다. 일종의 ‘여행자로서의 특권’이 베트남에 와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앞선 세 국가보다 베트남이 나를 가장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1. 현지인처럼 보이는데,
  2. 베트남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고,
  3. 추레한 행색을 한 채
  4. 자전거에 짐을 주렁주렁달고 떠돌고 있으니 말이다.

백인은 이 점에서 동양인보다 확실한 우위가 있다.

베트남 사람인 줄 알고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베트남어도 모르고 어버버 거리고 있으니 일단 멍청한 사람 처럼 보일 것이다.(여행하다보면 옷차림도 후줄근하고 외모도 지저분해진다.) 내가 느낀, 우리나라와 비슷한 이 나라의 가장 치명적인 단점 하나는, 베트남인들은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와 수준을 판단해서 상대방에게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직원이 손님에게 일관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예의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바뀐다. 특히나 백인에 대한 태도와 나에 대한 태도가 많이 다르다는 걸 여러번 실감했다. 특히 식당에 앉아서 내가 백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본 이후의 종업원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변하는 것을 여러번 느꼈다.(갑자기 상냥해진다.) 개발도상국이 명품, 아이폰, 좋은 차와 같은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한국적인 나라에서 가장 강한 인종차별을 느끼고 있다.

베트남 사람이 운영하는 한식당의 한국 음식은 베트남 특유의 향이 강하게 난다. 은근히 맛있다. 새콤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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