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선 헬멧을 깡깡 내리쳐야한다: 태국 시골길의 생존 법칙
[동남아 자전거 여행] #07 태국 2024.12.18-19 수판부리, 차이낫 여행기. 그리고 이어지는 개들과의 혈투. 막대기는 필수다.
2024.12.18
호텔에서 조식을 주길래 당연히 먹고 나왔다. 어제 개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오늘은 두가지 무기를 준비했다. 첫 째로 어제 산 청소막대기, 둘째로 자전거 페달렌치. 막대기는 가볍고 약해 그냥 겁만 주는 용도라면 렌치는 묵직한 쇳덩이라 실제 전투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이걸 쓸 일이 없길 바란다.


오늘 목적지 후보는 두개이다. Uthong과 좀 더 가면 있는 Suphan buri라는 곳. 일단은 70km 부근인 Uthong까지 달려보고 더 갈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다. 개가 무서워서 라이딩이 마냥 즐겁만은 않다.
해, 바람, 비, 오르막, 온도, 갓길 여부, 일출 일몰시간, 중간 보급장소, 물 등 자전거 여행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수도없이 많지만 이중에서 ‘개’가 내 태국 자전거 여행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지 몰랐다. 개는 해가뜨고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온순해진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 사이에 길바닥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데 이 때가 골든타임이다. 당연히 시골 구석 마을로 들어가면 낮잠이고 뭐고 없이 짖어대며 쫓아오는데 대부분의 개들은 이 시간에 상당히 온순해진다.
그래서 내가 정한 라이딩의 마지노선 시간은 오후 4시, 개들이 미치기 바로 전의 시간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시간까지 라이딩을 끝낼 생각이라 아무리 평지라도 긴 거리를 이동하지 못한다.
뉴질랜드에서는 해가 9시 쯤 지는데다 위협이 될만한 동물이나 곤충이 없어서 체력이 된다면 이론적으로는 오후 9시까지 라이딩을 할 수 있다.(아니 사실 밤에도 새벽에도 안전하다. 심지어 숲도 안전하다.) 하지만 여기는 오후 6시 전에 해가 지는데 그 이후로 자전거를 탔다가는 개들의 저녁만찬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개는 잡식동물이 아닌가? 개들은 특히나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공격적인데 그 이유를 대략 추측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개들은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사냥감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전거는 빠르게 움직이는데 차나 오토바이보다는 느려서 개가 딱 쫓아와봄직한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자전거 여행자는 개에게 있어 완전한 이방인이다. 낯선 냄새와 생김새를 가진 존재가 자기네 공간에 들어오는 경우는 자전거 여행자를 제외하고는 많이 없을 것이다. 일반적인 여행자들은 이 정도의 시골에는 당연히 들어갈 일이 없고 심지어 다른 지역에 사는 태국인일지라도 다른 시골 마을에 들어갈 일은 잘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사는 마을에도 외부인이 들어갈 일이 있을까?





여전히 시골길로 안내하는 Komoot 덕분에 오늘도 개와 실랑이를 좀 했다. 어이가 없는건 이 komoot 앱이 논두렁으로까지 나를 인도했다. 논두렁도 네비게이션에 길로 등록되어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논두렁부터 직감했다. 곧 개가 튀어나오겠구나.
역시나 예상대로다. 보통의 개들은 막대기를 꺼내면 따라오지 않는데 이 녀석들은 맹렬하다. 자전거에 내려서 소리도 치고 금속끼리 맞부딫히는 소리도 내준다. 렌치로 헬멧을 깡깡치면 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별 짓을 다해봤다. 다행히 무사히 통과.

숙소에 도착해선 근처 야시장에 가서 저녁을 해결했다. 태국은 어느정도 규모만 되는 도시면 다 야시장이 있는 거 같다. 가격도 싸고 맛도 훌륭하다. 야시장 뿐만 아니라 길거리 음식점도 널려있는 곳이 태국이다.

2024.12.19
오늘은 수판부리에서 차이낫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길거리에서 아침을 사먹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아침을 먹으려면 그 전날 아침거리를 캠핑장에 사들고가서 아침에 직접 해먹거나, 운이 좋으면 근처에 있는 슈퍼에서 아주 간단한 과자나 샌드위치 같은걸 먹는게 다였는데 여기서는 그 돈으로 아니 그 돈도 안되는 돈으로 제대로 된 아침을 먹을 수 있다.
음식값이 싸고 길거리에 음식이 널려있다보니 문제가 몇 개 생긴다. 첫 째론 돈을 얼마 쓰는지 제대로 계산하지 않고 음식을 사 먹게된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쌓이다보면 생각보다 돈을 많이 썼다. 또 길거리에 과일주스나 과일맛 탄산슬러시를 파는 곳이 많아서 먹다보면 하루에 세네컵씩도 먹게된다. 어차피 물도 사먹어야하는데 돈 좀 더주고 음료수 사먹자는 생각에 몸에 좋지 않은 음료를 자꾸만 먹는다.








오늘부터는 Komoot 경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있다. 태국은 고속도로 같이 큰 국도에도 자전거를 쉽게 탈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갓길이 있다. 그래서 단지 차를 피하기 위해서만이라면 굳이 골목 골목 작은 마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일직선으로 난 큰 길을 따라가는건 재미는 없다. 차 소리도 시끄럽고 매연 때문에 때론 머리도 아프다. 개만 없다면 시골길이 훨씬 재밌고 경치도 좋은데 이게 참 아쉽다.
며칠간 개에 시달리니 개의 행동에 대해 많이 관찰하게 되고 고찰하게 된다. 다음은 자전거를 타면서 생각한 개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일단 개는 대체로 공격수라기보다는 수비수의 포지션이다. 일부러 사람을 찾아서 공격을 하지는 않는단 뜻이다. 극소수의 떠돌이개들이나 미친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개들은 자기 집이 있고 자기 영역이 있는데 누군가 이 영역을 침범하거나 자신이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사납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만 벗어나면 쫓아오지 않고 다시 제 집을 찾아 들어간다.
외부인의 출입이 어쩌다 가끔있을 법한 동네에 무기 두개를 가지고 들어가는건, 개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과거 스페인 제국주의가 잉카문명에게 한 행위를 연상케한다. 웬 하얀 놈들이 불연듯 나타나 자기 친구와 가족들을 죽이고 각종 보석과 귀중품들을 약탈해간 역사. 개 입장에서는 평화로운 제 집 앞마당에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이방인(나)이 들어오는건데 필사적으로 짖고 달려드는 그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러 간다는 명분 하에 조선에게 그 길을 터달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미쳤다고 길을 터줬을까? 당연히 거부했고 이는 임진왜란으로 이어졌다. 그 시골길을 자전거로 쌩 지나가면서 개들이 조용하길 바라는건 마치 이와 비슷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애국심이나 충성심과 같은 거창한 명분이 아닌 제 터전을 지키기 위해 목숨바쳐 싸웠을 것이다. 개들도 자기 영역이 침범받으니 그렇게 공격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될 수 있으면 차가 다니는 큰 길로 다니기로 했다. 그 길에는 오토바이, 경운기, 이름 붙이기 애매한 운송수단들이 전부 다니니까 자전거도 안전해보인다.



차이낫 숙소에 꽤 일찍 도착했다. 캠핑장에는 일찍 도착해도 텐트를 치고 짐 정리하고 하다보면 시간이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는데 여기선 숙소에서 자기 때문에 뉴질랜드에서보다 시간이 많다. 그래서 올해 초에 1년 등록해놓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던 화상전화영어 플랫폼 "캠블리"에 오랜만에 접속해서 예전에 한참 수업했던 튜터와 한시간 동안 전화했다. 숙소는 인터넷 플랫폼에 없어도 구글지도에 나오는 작은, 우리나라 모텔이나 여인숙 같은데 가면 아주 싼값에 숙소를 구할 수 있다.
이 튜터로부터 예전부터 동남아 여행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었었는데 오늘 새로운 정보를 하나 또 들었다. 며칠 전 방콕에서 호스텔 여주인 중 한명이 “라오스에는 술에 메탄올을 탄다.”라고 했었다. 나는 당연히 그것이 만국공통, 제 옆나라를 악마화하는 오랜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었다. 하지만 실제로 몇 주 전에 라오스에서 메탄올이 들어간 술을 먹고는 유럽인이 6명인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아… 앞으로는 현지인의 말을 함부로 넘겨짚지 말아야지. 뭐 어차피 나는 해외에서 맥주말고 다른 술은 몰라서 안마셨을거였지만.
낮잠 한숨 자고 또 야시장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