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의 얼굴과 피터 싱어의 연못: 캄보디아의 빈곤 앞에서
[동남아 자전거 여행] #36 캄보디아 2025.02.10 프놈펜을 떠나 베트남 국경으로 향하며 마주한 캄보디아의 처절한 가난. 소득의 상당부분을 기부해야한다는 피터싱어의 주장이 떠오른다.
2025.02.10
베트남 국경까지 딱 이틀만 가면된다. 며칠 전부터 페달을 밟으면 자꾸 삐그덕거리고 틱틱하는 소리가 들려서 출발하기 전에 근처에 들러서 점검을 받았다. 자전거 가게 주인 말로는 내 페달이 중국산이라 원래 별로 좋지 않은 제품인데 너무 오래타다보니 마모가 되고 먼지가 많이 끼여서 그렇다고 한다. 근데 소리가 나도 다른 부품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하니 페달 청소만 한 번 하고 말았다.


둘 다 캄보디아 사람 아닌가?


발전된 프놈펜의 풍경
프놈펜을 빠져나가면서 새삼 라오스의 수도보다 캄보디아의 수도가 훨씬 발전 되었다고 느껴진다. 높은 건물들 하며, 멋진 다리하며 그나마 수도라서 볼 게 좀 있다. 프놈펜부터 호치민까지는 터키부터 일본까지 연결되는 아시안하이웨이 1번 노선의 일부인 국도 1번을 타고 간다. 이름답게 포장이 잘 되어있고 차량 통행량이 많다.

오늘 숙소는 15$짜리 방인데 겉보기에는 깔끔해보였는데 안타깝게도 개미가 엄청나게 많다. 이런 방에서 자기 위해서는 침대 위에 텐트를 쳐버리면 그만이다.
근처에 제대로 된 슈퍼는 없고 자그마한 점포 뿐이다. 숙소 주인 아주머니에게 물어봐서 간 곳에는 파리가 들끓는 생선 구이와 정체 불명의 고기를 파는 곳. 이 사람들은 이런 음식을 일상적으로 먹는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숙소 주인 세 가족이 사는 집이다. 숙소 옆에 컨테이너 박스로 자그마한 공간이 있는데 그 곳에 자전거를 넣어놓으라길래 들어갔다. 세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보이는데, 이게 캄보디아 인들의 삶이구나라고 새삼 충격을 받았다. 우선 침대 위에는 개와 아이가 꼬질꼬질한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다.(아이는 신발을 신지 않고 돌아다닌다. 캄보디아에는 맨발로 다니는 사람이 많다.) 거기에 집 안에 개 먹이와 어떤 가축의 사료로 보이는 것들이 놓여져있고 바로 옆에 부엌으로 보이는 식기구들이 있다.
중세 시대 유럽 사람들이 딱 이렇게 살았다고 한다. 추워서 가축과 함께 나뒹구는 삶. 위생에 대한 개념이 하나도 없던 시절. 이 가족은 그래도 꽤나 관리된 숙소의 주인인데, 그렇다는 건 적어도 캄보디아에서는 중산층 이상 이라는 것이다. 거기다가 여긴 국도 1번 코스 중간에 위치한 곳으로서 어느모로 보나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다. 적어도 캄보디아 내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는 것인가?
연마되지 않은 타인의 실제, 지금 같은 경우에는 캄보디아 인들의 가난을 직접 마주하게 되면 불쌍함, 안쓰러운 감정보다는 불쾌함이 가장 먼저 마음 속에서 솟아오른다.
이 꺼끌꺼끌한 면을 통해 우리는 타인의 실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인식의 확장은 가끔 구토감과 역겨움을 동반한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때로는 이런 경험이 책보다 더 날이 선 도끼일 수 있겠다. 나로 환원될 수 없는 타자가 가득한 이 곳. 내가 국도 1번이 아닌 흙길을 따라 캄보디아의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번 해봤는데, 마치 아마존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 인식 지평 너머에 있는 사람들.
여기에 더해 수도 없이 여기 저기서 솟아오르는 얼굴들 때문에 캄보디아 여행을 지속하기가 심리적으로 어렵다. 레비나스가 옳았다. 타자는 윤리적 명령으로서 나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렇게 사는데 너는 한가롭게 여행이나 하니? 참 운좋다.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마음 깊은 속 여기저기서 이런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이것이 라오스나 캄보디아 같은 최빈국 여행의 가장 큰 고통이다.
존 롤스는 그의 저서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 즉 사회의 법과 제도를 정할 때, 자신의 신분(부자/가난, 남성/여성, 능력자/약자 등)을 모르는 상태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설명한 적이 있다.
거기다 피터싱어는 소득의 일부를 빈곤층에게 기부할 의무가 있다며, 눈 앞에 어린아이가 물에 빠져 죽게 내버려두는 것과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그저 방관하는 것에는 어떠한 도덕적인 차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그의 말에 따르면 기부는 선택이 아닌 의무다. 그의 주장은 많은 논쟁을 낳았지만 동시에 전세계의 수많은 생명들을 극단적 빈곤으로부터 구제했다.
피터 싱어는 "연못에 빠진 어린 아이를 구두가 더러워질까 봐 구하지 않는 것과 지구 반대편에서 굶주리는 아이를 외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 기근 풍요 도덕, 피터 싱어 저.
게다가 싱어는 자신과 가족을 돌보는 데 꼭 필요한 비용만 남기고, 그 이상의 소득은 타인을 위해 써야 한다고도 말한다.
아래는 몇 년 전 읽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 10년이 넘은 책이라 지금과 수치적으로는 조금 달라 졌을 수 있다.
얼른 이 곳을 벗어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