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잡이 자전거 여행자의 비극: 테무도 알리도 없는 로토루아에서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04 2024.11.07-08 온천 마을, 로토루아 호스텔에 태극기를 걸었다
2024.11.07
아침에 일어나 준비하는데 친구 지웅이한테 영상통화가 왔다. 그 시간이면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가 넘었을텐데.
통화하며 준비하느라 덕분에 칫솔을 잃어버렸다. 텐트를 가지고 다니면서 캠핑을 하면 짐이 많아서 준비시간이 상당히 오래걸린다. 결국엔 자전거가 이동하는 집이지 않은가. 이때까지만 해도 짐싸고 짐정리하는데 완벽히 적응이 안돼서, 텐트를 치고 짐을 놓고 하는데만 한시간 반, 텐트를 접고 짐을 챙겨서 자전거에 패킹하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아무튼 엄청나게 번거롭다는거다.
여기 캠핑장에서 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호빗마을을 놀러간다. 투어 한번에 10만원이 넘는건 자전거 여행자는 웬만해선 꿈도 꿀 수 없다. 뉴질랜드에서 이런 저런 투어 전부하고 다니다가는 한달에 천만원은 우습게 쓸거다. 이후로도 수 많은 투어들을 만날거지만 대게는 그냥 통과할 예정이다. 뉴질랜드 여행 오기 전 생각해놓은 단 하나의 투어가 있다면 남섬에 있는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 투어.
아직 몸이 자전거 여행에 적응을 잘 못한터라 한번은 침대에서 자보고 싶다는 생각에 호스텔을 예약했다. 한국 돈으로 25,000원 정도 되는 Rotorua에 있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이다. 70키로 정도만 가면 돼서 오후 2시 반 정도에 도착할 수 있다.
점심을 먹지않고 계속 페달을 밟는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13.8km의 오르막도 넘는데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오르막도 오르막인데다가 길도 구불구불하고 갓길도 없는데다 차도 쌩쌩달려대니 자칫하다간 요단강행이다. 내 경험상 자전거는 오르막이 내리막보다 훨씬 위험하다. 오르막에서는 자전거와 차의 속도차이가 많이 나고 경사가 심한 곳은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서 차 운전자의 시야도 넓지 않다. 긴장하고 오르막을 올라 손에 쥐가 난다.


예상한 시간에 Rotorua에 도착했다. Rotorua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지열지대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온천이 많고 호수나 하수구 같은데서도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여기는 관광산업이 많이 발달해있어서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다. 당장에 나랑 같은 방에 묵은 사람들만 해도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몸이 너무 뻐근해서 온천을 즐기고 싶긴 했으나 가격을 보고 그만뒀다.



중간에 있는 한국인 아저씨를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다시 한번 만났다. 호스텔에 태극기가 없어서 하나 기부했다.
외국에 나와서 호스텔은 처음 써보는데 그 문화는 익히 들어 알고있다. 남녀가 한 방에서 같이 자고 방에서 아무렇게나 옷을 갈아입는 그런 문화. 그것보다는 자전거 보관문제, 자전거 짐(텐트까지 큰 가방이 5개)이 많아서 이걸 신경쓰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침대가 편하고 좋긴한데 사람, 도난 스트레스 면에서는 캠핑이 압승이다.

2424.11.08
퇴실 시간도 넉넉하겠다, 몸도 찌뿌둥하겠다, 오늘은 Rotorua와 Taupo 사이에 있는 35km 떨어진 캠핑장에서 캠핑을 하면 되겠다 싶어서 마음이 여유로웠다. 아침은 3일 전엔가 샀던 식빵과 쿠키(이걸로 4일의 아침과 간식을 해결했다.)를 먹고 짐을 싸고 출발. 근처에 유명한 간헐천이 있는데 그걸 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했기에 입장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호스텔과 1km도 채 되지 않는데 위치한 Kuirau Park로 향했다.

이상하게 내가 갔을 땐 호수가 아주 고요하길래 지열 활동이 없는 시간인가 싶어서 그냥 슥 둘러보고 나와버렸다. 처음 오클랜드 공항에서 40기가의 데이터를 샀는데 이게 은근히 부족하다. 저렴한 캠핑장에는 와이파이가 잘 되는 곳이 없어서 데이터를 써야하는데 자기 전까지 핸드폰을 만지다보면 데이터를 순식간에 쓴다. 데이터 때문에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 근처 매장으로 가서 100기가를 추가로 구매해버렸다.

원래 계획은 뉴질랜드에 와서 매일 매일 책을 읽을 생각이었어서 데이터가 이만큼 필요할 지 몰랐다. 근데 예상외로 모든 일정이 끝나고 텐트에 누워버리면 멍하니 유튜브 감상이나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체력이 남지 않는다. 이것도 적응되리라 믿는다.
아무튼 Rotorua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캠핑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문득 '세상이 왜 이렇게 선명하고 아름답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기운이 온 몸을 엄습하고 순간 자전거 고글을 잃어버렸다는 자각을 했다. 호스텔에도 전화해보고 핸드폰 매장에도 전화해봤는데 고글을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왔던 길을 전부 되돌아간다. 호스텔, 핸드폰 매장을 전부 직접 들렀는데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혹시라도 찾으면 연락달라는 말을 남기고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그 고글로 말할거 같으면 안경 위에 얹을 수 있고 빛의 강도에 따라 진하기가 변하는 변색렌즈를 사용한 고글이다. 뉴질랜드에서 테무나 알리가 아니면 절대로 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경을 낀 사람은 일반적인 고글을 낄 수 없어서 이런 특이한 형태의 고글을 써야한다. 고글 없이 다니면 되지 않냐라고 물을 수 있는데 내리쬐는 햇살에 100키로를 넘게 달려버리면 눈 부신건 둘째치고 눈에 온갖 이물질이 들어와서 염증을 일으킨다. 안그래도 눈에 만성염증이 있는데 이것까지 없으면 정말 최악의 자전거 여행이 되지 않을까.
Rotorua는 꽤나 큰 도시라서 자전거샵이 많았다. 혹시라도 이런 형태의 고글이 있을까 싶어서 자전거 샵을 5군데 정도 돌아봤는데 이런건 찾을 수 없단다. 엄청난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말 그대로 하루종일 우울했다. 자전거를 다시 타고 캠핑장으로 돌아가면서도 우울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글이 없어도 잘 갈 수 있다. 다른 여행자들도 선글라스도 없이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라고 스스로를 타일러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길거리에서 "Awesome"을 외쳐주는 아저씨를 만나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한 형태의 슬픔은 다른 형태로 쉽게 전환되고 한 가지에 대한 걱정은 다른 것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옮아간다. 고글이 없어져서 우울한 마음이 드니 여행 자체에 대한 회의감도 들고 무엇보다도 극한으로 외로운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사서 고생을 하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연인이나 가족이랑 다니는데 왜 나는 혼자서 이러고 있지." 같은.


혼자 다니면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이 때론 부럽다.
고글 하나 잃어버렸다고 여행을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자전거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어쨌든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고 고글은 내일 Taupo에 가서 다시 알아보자는 생각에 슬픔을 안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