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 Lake Marian과 Key Summit과 밀포드 사운드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22 2024.12.06 오스트리아 친구와 밀포드 사운드 근처 캠핑장에서 보낸 3일. 마리안 호수와 키써밋 트레킹
2024.12.06
나는 여기 하이킹 코스를 잘 알지 못한다. 며칠 전에 이 친구랑 얘기하면서 Chat GPT에게 물은 몇가지 정보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는 인터넷도 안되는 캠핑장이라서 더 많은 정보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이 친구가 뉴질랜드 관련 책을 읽으면서 구글 지도에 많은 하이킹 코스를 표시해 놓아서 GPT 정보와 그 정보를 상호 비교해가며 오늘 갈 하이킹 코스를 몇 가지 선정했다.


이 친구는 커피포트도 가지고 다닌다. 점심으로는 항상 저런걸 만들어서 가지고 다닌다.
다행히 오프라인 지도앱 맵스미는 잘 실행 되었기 때문에 첫 번째 장소인 Lake Marian Track으로 출발했다. 언뜻 비슷한 느낌을 가진 자전거 여행과 하이킹은 각자만의 매력이 있다. 특히 하이킹은 자전거보다 자연과 훨씬 더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틀간 하이킹을 하면서 내 안에 있는 어떤 미지의 태곳적 욕망이 꿈틀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자연 속을 걷다보면, 특히나 내가 알지 못하는 환경으로 둘러쌓인 자연 속에 있다보면 원시적인 감각이 되살아나고 우리 조상들이 땅을 밟고 숲과 산을 누비던 시절의 흔적이 나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경로는 스트라바 히트맵으로 짰을텐데.
-2026. 03. 08


인간은 원래 자연 속에서 살아왔고,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본능적이고 살아있다는 느낌, 이 느낌 속에서 이틀간 몇번이나 아이처럼 소리치며 뛰어다녔는지 모르겠다.
Lake Marian 초입부에서 벌써 하산하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이 남성의 정체는 이틀 뒤에 알게된다. 이 친구는 오스트리아 시골에 살았고 부모님도 하이킹을 정말로 좋아하는 분이라 자연과 상당히 가까운 삶을 살아온 듯 했다. 어떤 하이킹 코스나 눈 덮인 설산은 자기 고향과 닮아 있다고 했는데, 캠핑하면서 만난 다른 유럽인들(특히 독일인)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뉴질랜드는 유럽과 많이 비슷한 느낌이 든다고.
내가 우리나라 등산을 별로 가보지 않아서 함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몇 번 가본 입장에서 감히 비교해보자면 뉴질랜드의 등산코스는 우리나라의 등산코스보다 덜 다듬어져있어서 더 와일드한 느낌이다. 그래서 더 재밌다. 어릴 때 계곡에 놀러가서 바위 위를 뛰어다니는 느낌, 위험한 놀이터에서 노는 느낌.
Lake Marian 코스 정상에는 이름답게 Lake Marian이 있다. 피오르드 지역 빙하가 녹아져서 떨어진 물들이 호수를 이룬다. 사람이 벌써 몇몇 모여있다. 역시나 샌드플라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이 와중에 하나는 갑자기 수영을 하고 싶다며 가방 속에 있는 수영복으로 옷을 갈아입고는 물에 뛰어든다. 아무래도 이 친구는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인 듯 하다.







이 세상에 몇몇 축복받은 사람들은 자의식이 별로 없다. 때문에 자기가 하는 행동, 자기가 보고 느끼는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다. 반면 자의식이 강한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가 하는 행동들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는데 이러면 그 상황을 온전히 즐기기가 힘들다. 나는 아무래도 전자보다 후자에 가깝다. 긴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내 자의식을 조금이라도 죽일 수 있길 바란다.
Lake Marian 트랙을 내려온 후 계곡에 앉아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바로 Key Summit 트랙으로 향했다. 이곳은 아까 하이킹보다 더 정돈되고 다듬어진 느낌이라 사람이 많고 아까보다 덜 재밌다. 오늘 내일 하이킹을 하면서 일본 사람 몇몇을 여기서 만난 것 빼고는 아시아권 사람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 곳을 끝내고 이제 밀포드 사운드로 향했다.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고도 불리는 밀포드 사운드. 가는 길부터가 압도적이고 장엄하다. 이 곳은 연중 200일 정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가장 가까운 마을(역시나 중간에 아무것도 없다.)인 테아나우에서 밀포드 사운드까지의 거리는 100km 정도가 되기 때문에 정말 큰 맘을 먹지 않는 이상 자전거로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데도 운전을 하면서, 이곳에 자전거를 타고 들어왔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번에 확실히 느꼈다. 자전거를 타는 것과 차를 타는 것은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받는 느낌이 크게 다르다. 자전거는 도로와 자연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지면의 높낮이, 냄새, 바람, 비 등을 그대로 맞딱뜨려야 하는 만큼 그곳의 아름다움과 광할함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만약 이곳에 자전거를 타고 왔다면 며칠 전 푸카키 호수에서 느꼈던 벅차오르던 감정 이상을 느꼈을 것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아름다움에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를 운전하니 “와 정말 아름답다.” 정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밀포드 사운드를 제대로 보려면 크루즈 투어를 해야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을 예정이라 그 근처에 있는 트래킹 코스를 좀 걸었다. 트래킹 코스가 그리 많지 않고 우리가 가진 정보도 별로 없어서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뉴질랜드 여행가기 전에 봤던 영상. 가슴을 뜨겁게 했다.





하나는 갑자기 어떤 충동이 든다면서 트래킹 코스 주변에서 옆돌기를 했다. 갑자기 너무 하고 싶었다며. 상대방에게 4차원으로 보이고 싶어서 특이한 행동을 하는 사람만큼 어색하고 추한 사람이 없는데 이 친구는 그런 자의식이 전혀 없이 순수한 자기 충동 만으로 옆돌기를 했다.
슬슬 어두워지고 우리 체력도 한계에 다다른다. 더 늦기전에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비고와서 캠핑장에 딱 하나 있는 쉘터에서 파스타를 해먹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재밌는 영국인들 만났는데 이 사람은 뉴질랜드에서 하이킹을 하고 있지만 몇 년전에 영국에서 출발해서 자전거를 타고 유럽을 한바퀴 돌고 인도를 거쳐 동남아를 투어한 후, 뉴질랜드에 왔다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갔댔다. 내가 가는 코스를 반대 방향으로 한 셈이다. 동남아 자전거 여행도 정말 재밌었단다. 기대가 된다!
여행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벌어질 때가 있다. 여행에서의 특정 사건은, 내가 여행을 회상할 때 내 기억의 전면으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그 여행 이후의 내 삶의 항로가 그 때 느끼고 경험했던 쪽으로 향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때의 경험은 내 정신 속에 부피는 적게 차지하지만 밀도가 압도적으로 높은 나머지 매우 무겁게, 하지만 작게 나의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게된다. 그리하여 마치 나침반처럼 이후에 내가 가게 되는 방향을 계속 지시해버리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날과 이 다음날의 여행이 나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2026.03.08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