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는 사랑이 빠져있어요: Lindis 고개 넘기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19 2024.12.02 100km 이상의 황무지 Lindis 고개 자전거로 넘기. 거기서 마주한 루핀꽃

지도에는 사랑이 빠져있어요: Lindis 고개 넘기

2024.12.02

어제 밤부터 코스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뉴질랜드 남섬은 우리나라의 1.5배 크기인데 인구 수는 123만명 정도다. 인구밀도가 적다보니 중간에 마을이 별로 없다. 오늘의 선택지는 2개.

30km 정도만 가면 있는 omarama에 있는 캠핑장에서 하루 쉬고 그 다음날 100km 뒤에 있는 luggate에 들를지 아니면 luggate로 바로 갈 지(133km). 133km에 상승고도 1000m 이상은 아직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난이도라서 상당히 힘들걸로 예상이 된다. 133km면 대구에서 부산보다 먼 거리다. 이 사이에 마을이 딱 1개 있다는 건데 그것도 30km 거리에 있다. 100km이상 중간중간 마을이 없다는 뜻이다.

omarama에서 luggate 사이에는 lindis pass라는 무서운 이름을 가진 언덕구간이 존재하는데 구글맵으로 확인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다. 마을, 슈퍼는 물론이고 주유소 조차 없다. 캠핑장이 없는건 당연지사.

결국 출발할 때 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omarama에 가서 생각해보기로 했다. 어제 함께 저녁을 먹은 한국인 커플들에게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선다.(아이스크림을 또 얻어먹었다.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omarama까지는 평탄한 길이라 생각보다 별 힘들이지 않고 금방 도착했다. 그 마을에서 간단히 음식을 사먹고 물을 보충한 후 찬찬히 계산을 해본다. 해는 9시가 넘어서 지니까 상관없고 캠핑장 reception desk에 7시 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마음을 먹는다. 그래 100km를 더 가보자. 혹시나 7시까지 못가더라도 방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다시 출발했다. 죽으란 법은 없지. lindis pass 초입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갓길은 좁고 생각보다 차는 많았다. 예상만큼 언덕은 많았고 오르막은 가혹했다. 그래도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차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

지도로 봤을 때 느꼈던 그 무서움은 실제로 그 땅에서 자전거를 타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길가에 핀 예쁜 루핀꽃을 보고, 새소리를 듣고 따뜻한 햇살을 마주하다 보니 이유 없는 행복감이 나를 감쌌다. 중간에 물을 보급할 곳도 없을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깨끗한 시냇물이 있다. 위급한 상황이 생긴다면 소나 양을 찾으면 된다. 가축이 있다는 것은 그 주변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 정말로 극한의 상황에 까지 치닫게 된다면 그냥 갓길에 누워있으면 된다. 그 모습을 본 운전자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나를 구하러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인보다도 더 선하니까.

오늘 내가 지나온 황무지 곳곳에는 무수한 루핀꽃이 있었다. 내가 봤던 그 지도,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지도에서 사랑과 경이를 더하면 실제 모습이 완성된다. 오늘 나는 길가에 핀 루핀 꽃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가 오늘 내가 아무것도 없는 이 황무지를 지나갈 때 힘이되라고 오래전 심어놓은 것 같은 느낌을 나는 받았다.


오늘의 적당한 구름은 햇빛을 막아주어 내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게 달릴 수 있었다. 오늘은 내 자전거 여행 중 가장 먼 거리를 달린 날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가장 행복하고 감사했던 날이기도하다.

출발 전에 보통 마실 물의 양을 계산해서 필요하면 다른 물통에 더 채워가야하는데 감기기운 때문에 물을 생각보다 더 마셔버렸다. 갓길에 차를 세워 놓은 아저씨에게 물을 좀 줄 수 있냐 부탁하나 나한테 있는 모든 물통에 물을 가득가득 채워주셨다.

물론 체력적으로는 힘들었다. 확실히 긴 거리였고 허벅지는 욱신거렸다. 그렇지만 기분은 확실히 좋은 날이다.

6시 30분 정도에 캠핑장에 도착했다.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