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이싱 대회를 뚫고 5시 약속을 지키러 가는 자전거 여행자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14 2024.11.23 캠핑과 음악을 좋아하는 채식주의자 웜샤워 호스트집에서 보낸 하루
2024.11.23
오늘의 목적지는 뉴질랜드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Christchurch 바로 위에 있는 작은 도시 Rangiora에 있는 한 웜샤워 호스트 집이다. 오늘 하루의 라이딩을 요약하자면 자전거 여행을 한 이래로 ‘가장 힘들고 지루했던 라이딩’이다.
오늘 날씨는 하루종일 흐렸고. 한동안은 이슬비도 내렸다. 날씨가 흐려서 풍경이 안좋아 보였는지, 실제로 이 길의 풍경이 안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풍경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내가 흐린날과 비오는 날을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제껏 생각해왔는데 이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오르막을 올라가는데 큰 가방을 메고 짐을 매단 여자가 내 옆을 Hello 하면서 쌩 지나갔다. 짐도 무거워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빠르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고 싶지 않았다. 꽤 무리해서 8km 정도를 같이 달린 후에 겨우 따라잡았다. 나보다 짐이 훨씬 가볍거나 더 비싼 자전거겠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오늘은 길도 영 좋지 못했다. 비포장 길이 많았다. 뉴질랜드는 자전거 길이 비포장 자갈길이 많은데 이런 길을 달리기 위해서는 바퀴가 크고 넓어야 한다. 하지만 내 바퀴는 그만큼 넓지 못해 이런 길을 달리면 자꾸만 미끄러지고 바퀴가 빠져서 평지인데도 오르막을 올라가는 속도밖에 나지 않는다.
한번은 네비를 잘 따라가는데 길이 없는 개울가를 넘어가라는거다. 발목 정도 높이의 개울인데 개울 넘어를 잘 살펴봐도 길이 보이지 않아서 큰 도로로 우회해갔다.
오늘따라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레이싱 카들이 많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면 내 옆을 지나가는 차나 오토바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슬린다. 트럭은 크고 위협적이고 오토바이는 시끄럽다. 소리가 작은 작은 차들은 오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나타나 나를 깜짝 놀래키기도 한다. 어쨌든 오늘 레이싱카들이 많이 보인 이유가 있었다.
도착지에서 머지 않은 지점에서 자갈길을 달리고 있는데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유달리 도로가에 사람들이 단체로 모여있는 곳이 많았다. 어떤 여성분이 나를 급히 불러세우더니 레이싱 카 대회를 하고 있으니 3분 후면 내가 달리는 길로 엄청나게 빠른 차들이 지나갈 거란다. 레이싱 대회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있었던 것이었다.
그 무리는 나에게 같이 맥주와 음식을 먹으면서 레이싱 구경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는 오후 5시까지 웜샤워 호스트에게 가기로 약속한 터라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레이싱은 저녁 7-8시나 되야 끝난다고 한다. 여기서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그 시간까지 발이 묶인다는 뜻이다. 재빨리 레이싱 구간을 탈출할 마음을 먹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달려갔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혼자 자전거를 타는게 이정도로 민망할 줄은 몰랐다. 결승점을 자전거를 타고 통과했는데 너무 민망해서 후다닥 도망가버렸다.

결국 5시 10분이 다 되어서야 호스트 집에 도착. 집은 상당히 깨끗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다. 미술품과 장식품들도 곳곳에 배치되어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내를 일찍 여의고 혼자 사시는 60대 초반의 아저씨이다. 몇년 전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할 때 웜샤워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본인이 받은 호의를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호스트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채식주의자라 고기는 얻어먹지 못했지만 맥주와 맛있는 채소, 아이스크림과 케익까지 후식으로 먹었다. 뉴질랜드 아저씨들 중에는 과묵하지만 이처럼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많은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