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키위(Kiwi)들이 가장 단호해지는 순간: "No Passport, No Beer"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13 2024.11.21-22 캠핑장에서 마오리족들의 전통 의식을 보았다. 다음날 크라이스트처치 근교 마을 Waiau의 펍에서 보낸 하루
2024.11.21
오늘은 비 예보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분다는 예보가 있다. 게다가 춥기까지 하다. 캠핑장에서 하루 더 묵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내가 텐트를 친 위치가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심한 해풍이 부는데 그것을 직격타로 맞는다는 거였다.(텐트를 칠 사람은 여기 치라고 캠핑장에서 정해준 위치이다.) 텐트가 심하게 흔들리면 날아갈까봐, 폴대가 부러질까봐 엄청 불안하다. 그래서 맘대로 다른 곳에 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텐트 옆을 지키고 있다.
오피스로 가서 텐트를 안으로 옮겨도 되냐고 여쭈었다. 물론 가능하다며 조금 내려가면 덤불로 둘러싸인 곳이 있으니 그 곳에 텐트를 치면 된다고 한다. 당장에 텐트를 걷어내고 짐을 싸서 그 위치로 옮겼다.(최소 1시간).
궂은 날씨 속 캠핑을 할때 멋진 경치와 안전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기는 힘들다. 경치를 원한다면 주변에 시야를 방해하는 지형지물이 없는 개활지에 텐트를 쳐야하는데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온다면 텐트 하나로 그 리스크를 모두 감수해야한다.


안전한 곳에 텐트를 치고 마음 편하게 있는데 어느 순간 수십명의 사람이 캠핑장 안으로 몰려든다. 주방에 가니 다과를 준비하고 계시길래 여기 파티하냐고 물었다. 파티는 아니고 이 캠핑장에 마오리족의 상징물들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념하고 축복(blessing이라 했다.)하는 행사라고 한다. 일종의 집들이나 개업식 비슷한거인 모양인데 그것에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가미된 것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아무튼 꽤 흥미로웠다. 특히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인상깊었는데 꼭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 처럼 느껴졌다. 진행자는 장식물들 하나하나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면서 캠핑장 곳곳을 누비는데 나도 전부 따라다녔다. 아쉽게도 간식을 얻어먹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맥주를 꼭 먹고 싶어서 오피스에 물어보니 9키로 떨어진 Kaiokura 마을로 가야 맥주를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좀 특이한게 작은 슈퍼나 가게에는 술을 팔지 않고 주류 전문점이나 큰 마트에 가야 살 수 있다. 어쨌든 맥주와 오늘 먹을 간식거리를 사러 출발.
마트에서 계산을 하려고 하니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25세보다 어려보인다면 직원은 상대방에게 신분증을 요구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주류 관련 규제가 우리나라보다 강하다. 사진으로 여권을 보여주거나 다른 방법으로 증명을 하려고 해도 반드시 실물 신분증을 제시해야만 한다고 한다. 항상 친절하기만 했던 뉴질랜드 사람들이 가장 단호해지는 순간이다.
어쩔 수 없이 프링글스와 소세지를 하나씩 들고 자전거 편도 30분의 거리를 다시 돌아왔다. 돈 아끼고 오히려 좋지뭐.

2024.11.22



내일은 여기로부터 190키로 가량 떨어진 크라이스트처치 근처 마을에 사는 웜샤워 호스트 집에 묵을 예정이라 오늘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Waiau라는 마을에 있는 캠핑장이 목적지이다. 펍의 주인이 캠핑장을 같이 운영하는데 무료로 제공을 한다.
오늘도 바로 옆 캠퍼벤을 끌고 온 부부에게 모닝 커피를 얻어먹고 출발. 오르막이 많지만 80km 정도만 가면 된다. 오르막이 많고 고도가 높아지면 대개 경치가 좋다.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은 자전거 여행의 가장 큰 묘미이다.
자전거 여행에서 자전거는 수단이자 목적이다. 단순히 도시와 도시사이를 넘나드는 교통수단이 아니라 라이딩 그 자체에서 오는 기쁨과 희열이 있다. 자연과 나 사이에 아무런 방벽도 없이 나아가는 그 순간에서 느껴지는 감각들은 내 몸 어딘가에 켜켜이 쌓인다.
열심히 오르막을 올라갈 무렵 캐나다 퀘백에서 온 부부 여행자를 만났다. 자전거로 보나 짐을 실은 페니어로 보나 꽤나 부유한 여행자이다. 함께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길을 가다가 짐을 싣고 달리는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나면 묘한 전우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같은 자전거 여행자들을 만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그들도 나를 만난걸 반가워하는게 느껴진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 심지어 어떤 한 무리는 박수까지 쳐주었다. 하고 싶은 여행을 하면서 응원까지 받을 수 있는 여행이 이것 말고 또 있을까, 민망함을 뒤로한채 웃음 지으며 앞으로 계속 페달을 밟았다.
80km와 100km는 많이 차이가 나지 않아보이지만 이 20km 차이는 엄청 크다. 오후 3시 반에 도착하느냐 오후 5시 넘어서 도착하느냐의 차이인데 도착했을 때 느끼는 여유로움의 차이가 크게 실감된다. 오늘은 3시 반에 도착해서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공짜로 캠핑장을 제공해주니 펍에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고 수제 햄버거를 사먹었다. 분위기는 로컬 술집 그 자체.
이 마을에 사는 듯한 한 젊은 청년은 모든 말에 fuck을 붙인다. 나에게도 말을 거는데 ‘하루종일 저 fucking bicycle에 붙어 있었단 말이야?’ 라며 이죽거린다. 상당히 시니컬하게, 뉴질랜드가 뭐가 좋아서 여행 오냐는 말도 덧붙이며. 관광지가 아닌 로컬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사람. 딱히 악의는 없어보여 전혀 밉지가 않다. 아마 내가 나고 자란 동네 술집에 자전거 여행자가 방문하면 이런 태도를 보일 사람이 한무더기일거다.
작고 오래된 술집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나이에 비해 다소 젊어보이는 여기 주인 아주머니는 자꾸만 나를 honey, love라고 부르는데 듣기에 약간 간지럽기는 하지만 썩 나쁘진 않다.
캠핑장은 술집 바로 옆이라 화장실을 같이 쓰는데 술집의 사람들이 모두 집에 가면 씻어야지하고 생각하다가 그만 잠들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