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트가 날아가거나, 차에 깔리거나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10 2024.11.16 첫 우중 라이딩 뉴질랜드 오타키 해변(Otaki Beach)에서의 자전거 캠핑
2024.11.16
아침에 빵과 계란을 먹고 출발한다. 이 집은 닭이 많아서 항상 신선한 계란이 많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오늘 가는 길은 흐리기만 하지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고 되어있었는데 오전 내내 비가 왔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4-5시간은 비를 맞고 달렸다. 노면이 미끄러워 바퀴의 바람을 조금 빼고 양말을 벗고 라이딩. 약한 비라서 큰 무리는 없지만 조금 춥긴 하다.


게스트북. 여행자들이 참 많다. 나 바로 위에 있는 Cam Anderson과 그 위의 사람은 며칠전 만난 영국인인데 여행이 끝난 아직까지도 스트라바와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식을 본다. 이 둘은 동남아도 갔는데 나와 여행 일정과 경로가 많이 비슷했다.
자전거 여행을 하면 비가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폭우나 며칠 동안 쏟아지는 비가 아닌 이상 하루 정도는 텐트가 비를 맞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비가 며칠간 오거나 폭우가 쏟아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면 캠핑을 할 수 없게 되고, 숙소에 묵어야 하는데 뉴질랜드에서 숙소는 비싸다. 어제처럼 좋은 웜샤워 호스트를 만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르겠다. 누군가는 타프를 가지고 다니면서 며칠 동안의 폭우 속에도 무사히 캠핑을 했다고 한다. 타프는 무거워서 꽤나 번거로운 짐이라 나는 아직 자신이 없다.


여행 초반. 적절한 복장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어젯밤에 웜샤워 호스트인 Lorraine 아주머니가 오늘 Wellington(내일의 목적지, 그 집에서 19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에 볼 일이 있어서 가야 하니 원한다면 태워주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오늘은 Otaki 해변에서 지는 석양을 보며 캠핑을 하고 싶었다. 앞으로 뉴질랜드에서의 내 경로상으로 볼 때 노을이 지는 해변가는 이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내가 오늘의 경로를 짜서 출발할 때 두 분이 고속도로를 피해서 가는 경로를 추천해 주셨는데 그리로 안 갔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다. 비가 오고 내내 안개가 낀 듯 뿌연 날씨.
저녁 5시가 다 되어서야 Otaki 마을로 들어선다. 여기는 무슨 일인지 도로마다 공사를 해서 내가 가는 길이 전부 막혀있다. 이 길을 피해서 저 길로 가면 막혀있고 다시 돌아가면 또 막혀있고. 덕분에 한참을 돌아서 해변가로 도착. 바람이 정말 강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일기예보에 강풍이 분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해변가에 텐트를 치니 최대 14m/s의 바람이 분다. 바람이 많이 불면 텐트 위에 플라이를 치기가 어려운데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 설치 완료.
텐트가 날아갈 거 같았다. 두 달 전쯤인가 텐트를 사고 피칭 연습해 본다고 포항 바닷가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잔 적이 있다. 그때는 텐트를 치는 개념이 하나도 없어서 모래사장용 펙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작고 얕은 펙으로 대충 설치했다가 아침 강풍에 텐트가 거의 날아갈 뻔했다. 실제로 펙이 뽑혔고 내가 두 손으로 붙잡지 않았다면 날아갔을 거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 철저히 설치했다. 펙을 8개나 박고 가이 라인을 이용해 무거운 돌에다가 묶고 모든 펙 위에다가 엄청 무거운 바위들은 얹어놨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풍이 잦아든다고 하니 폴대가 부러지지 않는 한 날아가지는 않을 거다.
여기는 원래 텐트를 치면 안 되는 구역이다. 화장실도 없고 물도 없어서 다 갖춰진 캠퍼벤만 출입 가능한 곳인데 관리하는 사람이 따로 없어서 한적한 곳에다가 텐트를 쳐버렸다. 내 텐트 플라이는 짙은 녹청색이라 해가지면 잘 보이지 않아 스텔스 캠핑을 하기 유용하다. 근데 여기는 차가 다니는 곳이라 이런 색의 플라이가 위험하다. 아무리 한적한 곳에 텐트를 쳤다한들 캠퍼벤이 무심코 내 텐트를 치고 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바람 소리에다 차에 깔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잠을 좀 설쳤다.
위험하고 자시고를 떠나서 여긴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다. 고통과 쾌락이 늘 함께 다니듯 아름다움과 위험도 동전의 양면처럼 늘 붙어 다닌다.
- 해변의 묘지 | 폴 발레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