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설산, 맨발로 주파하기: 밀포드 사운드 거트루드 새들(Gertrude saddle) 정복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 #23 2024.12.07 필수 준비물: 등산복, 레인재킷, 등산화, 조난 GPS 장치. 샌달 하나 만으로 거트루드 새들(Gertude Saddle)에 가다.

눈 덮인 설산, 맨발로 주파하기: 밀포드 사운드 거트루드 새들(Gertrude saddle) 정복

2024.12.07

오늘 하이킹 코스를 아직 못 정했는데 Gertrude Saddle이라는 유명한 하이킹 코스가 밀포드 사운드 근처에 있다. 여기는 이때까지 했던 하이킹 코스와 차원이 다른 난이도이다. 비가 오는 날에는 출입불가, 얼음을 발견하면 지체없이 돌아가라라는 표짓말이 있다. 그만큼 경사가 가파르고 미끄럽다. 고도도 많이 높아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한다. 연간 200일 비가 내리고 권장 하이킹 기간은 12월 중순부터 3월 초까지이다. 필수 준비물은 등산복, 레인재킷, 하이킹 신발, 조난 GPS 장치. 이 중에 준비된게 하나도 없다. 게다가 시작하기 전엔 몰랐는데 설산이었다. 마지막 한시간 정도를 눈을 밟으며 걸어야 했다.

내 신발은 트래킹 샌들. 복장은 당연히 형편없다. 자전거 복장을 입을 순 없어서 추리닝과 경량패딩을 입고 갈 예정이었다. 하나는 내 신발 때문에 절대 못 할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제 영국인과 얘기하면서 하이킹에 대한 열망이 갑자기 불타올랐다. 중간에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거트루드 새들을 가겠다고 호언 장담했다. 지난번 북섬에서 통가리로산 하이킹을 하면서 내가 하이킹에 꽤나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달아서 그냥 단순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친구는 내 신발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한다. 내가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단순 객기처럼 느껴지나보다. 여기서 동서양의 소통 방식에 대해 절감하게 되는데, 이 친구는 나보다 10살이나 어리다. 그런데 한껏 진지한 눈빛으로 삿대질을 하며 “Are you sure?” 이라고 계속 되묻는다. 자기는 중간에 돌아오고 싶지 않다며. 마치 내가 어린아이가 된 느낌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걱정하냐니까 자기는 하이킹을 잘 알고 너는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이렇게 걱정하는 거라고 한다.

나는 군대 있을 때도 느꼈지만, 다른 사람보다 상하관계나 나이 차이에 의한 꼰대문화에서 꽤나 자유롭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진짜 격 없는 대화방식”을 느껴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동양권 한국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가 아무리 경험이 그 사람보다 많더라도 10살 많은 사람에게 삿대질하면서 훈계하고 가르치려는 제스쳐를 취하지 않는다. 약간 기분 나쁘긴 하지만 흥미로운 경험이다. 피상적인 경험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3일간 내내 이 친구와 붙어다니니깐 이런 식의 차이가 계속해서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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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지금이었다면 가지 않는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등산에 대한 지식, 복장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던 상태에서의 치기어린 만용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지 비라도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 지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결국엔 저 오스트리아 친구가 옳았었지.
-2026.03.08

결국에는 거트루드 새들로 출발했다. 일반적인 권장시간은 4-6시간. 보통 이 정도 권장시간에 나 혼자 하이킹을 하면 4시간 안에 끝이나더라. 하지만 이 친구는 자기 페이스대로 천천히 걷고 싶다고 했다.

초반에는 평지를 걸었다. 다듬어 지지 않은 길, 유일하게 의지할 거라고는 중간 중간에 있는 주황색 표지판이다. 표지판을 계속 의식하면서 걸어야하는데 나는 그냥 멋대로 걸어서 몇번이나 길을 잃었다. 덕분에 반지를 파괴하러 가는 프로도가 가던 느낌의 돌 산을 이리저리 해멨다.

시작하자마자 바지를 걷고 개울을 건넌 후(엄청나게 차갑다.) 풀 밭을 건넌다. 그 후에 시작되는 급경사 코스는 자연 그 자체이다. 돌, 나무 뿌리, 폭포 등 날 것의 자연 그 자체를 걷는다. 여기는 관광객이 아니라 진짜 하이킹을 좋아하는 사람이 오는 코스라 사람도 많이 없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자전거를 타느라 살이 많이 빠져서 특히나 나는 오르막에 상당히 강하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데 남들보다 2배나 빠르다. 내가 히말라야에 사는 세르파 체형인가 라는 생각도 했다. 바위 코스는 재밌는게 동물처럼 팔 다리를 모두 사용해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면 기분이 끝내준다.

돌덩이 산을 지난 후에 본격적인 급경사 코스가 진행됐다. 로프가 설치돼있는 곳인데 로프를 잡고 등산하는 건 처음 경험했다. 하지만 날씨가 좋아 굳이 로프를 잡지 않고 빨리 걸었다.

꽤 올라가니 나는 내가 정상에 있는 줄 알았다. 왜냐면 그 위로는 전부 눈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손을 들어 아득히 높은 저 위를 가르킨다. 여기서 본격적인 한숨이 시작됐다.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샌들로 설산을 걸으라고? 시작하자마자 양말이 다 젖어서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눈 밭을 걷는것과 다름 없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렇게 조난당해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느낌이 절로 들면서 내 눈과 머리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F-word를 남발했다. 이 정도로 써보기는 처음이다. Fuxxing cold를 수도 없이 외쳤다.) 한참을 돌아가는 루트로 눈이 덮여있지 않은 가파른 돌덩이들이 보인다. 저기가 훨씬 낫겠구나 싶어 루트를 벗어나서 혼자서 돌덩이 위를 걸었다.

그래도 중간 중간에 돌덩이가 없는 구간들이 많이 있어서 눈을 그대로 밟으며 많이 걸었다. 끝없이 올라갔다. 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올라오지 말라는지 금방 깨닫는다. 정상에 가까이 갈수록 가파른 절벽과 높은 고도. 1m 옆으로 떨어지면 사망이다. 투어용 산이 아니라 도전자용 산이라 안전장치가 전무하다.

결국엔 해냈다. 올라가서 독일인 커플과 칠레인 카를로스를 만나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눴다. 멸종 위기종인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케아 앵무새도 만났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다시한번 통감했다. 아름다움과 위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나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삶은 재미없다.”라는 뉘앙스의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이런 느낌의 독일어 속담도 있다고 하는데, 꿀잼인 곳에는 독일인이 몰려있더라니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정상에서 만난 칠레인 카를로스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와서 체리농장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 왠지 모른 친근감이 많이 느껴졌다. 내려와서는 셋이 함께 개울 근처에서 라면을 끓여먹었다. 세개나 끓였는데 이 친구들은 매워서 한입씩 밖에 못먹었다.

하나는 이 와중에 또 수영을 한다. 반합을 씻으면서도 손이 얼거 같았던 그 물에서 말이다. 이제 슬슬 진짜 마무리 할 시간. 아직 오후 3시이니, 이 친구를 태워주고 퀸스타운 가는 길에 있는 캠핑장에서 도착하면 오후 5시가 좀 넘을거다.
테아나우에 있는 호스텔에서 하나와 작별인사를 했다. 벌써 3번째 작별인사인데 이번은 진짜 마지막이다. 주유를 하고 돌아서는 순간 어떤 남자가 히치하이킹을 한다. 평소 같았으면 지나쳤을 거 같은데, 하나도 이 사람과 같은 히치하이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퀸스타운으로 간다고 하는 체코인이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퀸스타운에서 한시간 넘게 떨어져있는 가는 길에 위치한 캠핑장인데 그 까지만 태워달라고 한다.

이 사람이 바로 어제 Lake Marian에서 아침일찍부터 하산하던 사람이다. 자기는 산 정상에서 하루 자고 아침에 내려왔다고 한다. 몇 년째 여행하며, 노숙하며, 일도하면서 산다고 한다. 뉴질랜드 산은 안전해서 산 정상에서 자는 일이 많다고 한다. 오늘 등산했던 거트루드 밸리 정상에서도 잤다고 한다. 정말 세상에는 나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하는구나. 한국인, 일본인 여자친구도 많이 만났단다. 인종의 힘을 다시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혹시 퀸스타운에 노숙할 곳이 있냐고 물으니 자기가 엄청 많이 알고있다고 한다. 어차피 새벽 6시 차 반납이라 해뜨기 전에 출발할 예정이라고 하니 아무 문제 없다고 한다. 목적지 변경, 퀸스타운으로 향했다. 서로 윈윈이다.

퀸스타운은 관광지라 캠핑장이 비싼데다가 아무데서나 캠핑하다 걸리면 벌금도 쎄다. 그런데 이 친구 말만 믿고 그곳에 갔다. 지붕이 있는 적당한 공간이 있다. 걸릴 일도 없을 거 같아서 텐트만 치고 노숙을 해버렸다.

며칠 째 씻지 못하는 것인가!

말 그대로 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