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100km보다 힘든 것: 태국 초등학생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

[동남아 자전거 여행] #10 태국 2024.12.22-23 핏사눌룩 호스텔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 영어 학원을 운영하는 John의 학원에서의 크리스마스 파티

자전거 100km보다 힘든 것: 태국 초등학생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

2024.12.22

어제 만난 일본 친구 마사는 만 19세, 곧 20살이 된다고 한다. 오사카에 있는 국제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작년에 3개월 유럽여행을 혼자서 했다고 한다. 방학을 맞아 봉사활동 겸 해외 체험 사이트에서 여기 호스텔을 지원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년에 미국 유학을 갈 예정이고 최종적으로는 NGO 단체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데 어린 나이답게 꿈이 크다.

무엇보다도 다른 일본인과는 다르게 영어를 잘한다. 일본 억양이 있긴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잘한다. 부모님이 자기 여행 경비를 전부 지원해주신다는데,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엔화 초약세 시대에 이렇게 여행을 하고 다니는 걸 보면 집이 상당히 잘 사는 모양이다.

Masa쿤
웜샤워 호스트 마크씨의 자전거. 저 닭으로 벨을 대신하는 모양이다.

호스텔 주인 Mark 씨는 호스텔과 함께 어린이 영어학원을 하나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 크리스마스 파티를 한다고 한다. 마사는 파티를 도와주러 간다고 하는데 나도 같이 간다고 했다.

내가 어릴 때 교회에서 토요일에 친구초청잔치나 다과회 같은 행사를 하곤 했는데 분위기가 그것과 똑같다. 중 고등학교, 아니 성인이 돼서도 교회에 어린이들 행사를 많이 도와줬었는데 그 때 봤던 우리 동네 한국 아이들과 사용하는 언어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분위기가 정확히 같다. 어수선하고 분주한 분위기.

오늘의 게임 진행자는 영국인 Richard 씨. Mark씨네 부부와 친한 사이인데 매년 태국을 방문한다. 아이들 이름을 다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꽤나 자주 와서 영어 학원 일을 도와줬던거 같다.

나는 몇 시간 애들이랑 놀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실내 형광등 불빛 아래서 분주한 아이들과 놀아주다보면 자전거 100km 타는 거 보다 더 힘들다. 저학년 아이들이 집에가고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었다.(얻어 먹었다.) 나는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고학년 아이들이 들어온다. 11-16살 정도 되는 아이들. 나도 게임 참가자가 되어서 같이 게임을 했다. 크리스마스 관련 문제 맞추기 게임. 예를 들어 “루돌프의 코는 무슨 색인가”,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식물 아래에 같이 있으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서로 키스를 하는데 그 식물의 이름은?” 같은 문제들(정답은 Mistle toe). Richard는 영국인스러운 농담도 한다.(남자끼리 있을 땐, 혀를 쓰면 안돼!)

쉬운 것도 있는데 이게 확실히 찐 크리스마스 문화권의 아저씨가 내는 문제라 어려운 것도 많다. 이 문화권에 사는 애기들도 맞추는 문제를 나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 마사는 이 친구들고 나이차이가 3-7살 정도 밖에 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14살 차이가 난다. 솔직히 너무 지루했지만 텐션 유지하느라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다.

간만에 애기들을 보니까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게임을 저렇게 신나게 웃고 뛰어다니면서 할까. 주인분께 죄송하게도 후반에는 힘이 너무 빠져서 한 구석에서 과자만 축냈다.


오후 세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마사와 저녁 6시에 야시장에 가기로 하고 잠깐 낮잠을 잤다. 여기 게스트 중 하나인 채식주의자 프랑스 여자를 야시장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는 태국 적응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서양에서는 하이킹이나 캠핑 같은 아웃도어 활동을 많이 했었는데 여기선 그런 것도 없고 무엇보다 음식이 좀 힘들단다. 채식주의자가 태국에 와서 살아남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저녁을 먹고 들어가서 같이 기타를 좀 치다가 잠에 들었다.


2024.12.23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에타이 파이터 John의 집에서 파티를 한다고 하여 이 호스텔에 이틀을 더 묵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다시 자전거를 타기로 마음억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호스텔 바로 앞에 있는 카페로 가서 커피를 한잔 시켜놓고 밀린 블로그를 썼다.

사실 이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시간이 남을 때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게 좋은데 이미 내 뇌는 숏폼 비디오에 절여져 고장나버렸다.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오랫동안 집중하는게 불가능해졌다는 말이다. 종이책이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텐데 내게 있는건 핸드폰 이북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핏사눌룩 여기저기를 좀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이곳도 꽤나 역사적인 도시라서 볼 것이 꽤나 많은 편이다. 너무 멀리가지는 않고 근처의 사원들을 둘러보고 팔찌를 몇 개 샀다. 서양인들이 전통 팔찌와 목걸이를끼고 원뿔모양의 밀집 모자를 쓰고 다니는게 멋있어보였는데 내가 끼면 아마 그냥 현지인처럼 보일거다.

태국에서는 케이팝과 같은 k-컨텐츠가 유명해서 한국인들이 꽤나 인기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적 있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한국인은 큰 키에 하얀 피부, 뛰어난 패션감각인데 나는 작은 키에, 자전거 여행으로 더 까매진 피부, 그리고 단벌 신사이다. 그들이 원하는 멋진 한국인에 나는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태국은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된 국가이지만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를 믿는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라는 유명한 태국식 외교술로 제국주의 시대에도 단 한번도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기에 태국은 우리나라나 다른 식민지배 국가 처럼 전통과의 단절을 경험하지 않았다. 오늘 자전거를 타고 절을 여러군데 방문했는데 태국이 불교국가임을 다시한번 절감했다. 화려한 사원에 수 많은 불상과 그리고 신도들. 불교는 태국인들 마음과 일상 속에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스텔로 돌아와 옥상으로 올라가니 오토바이로 여행 중인 한 독일인이 해먹에 누워있다. 내가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으니 경로상 이런 특이한 여행을 하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는 건지, 실제로 유럽인들의 다수가 이런 여행을 많이 하는건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희한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난다.

며칠 전에 “일본 무계획 여행이 위험한 이유”라고 해서, 일본 소도시를 계획 없이 여행하다 전철이 끊겼다는 내용의 짧은 숏츠를 본 적이 있다. 당장 댓글만 봐도 이런 상태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지만 당장 나만해도 저것보단 위험한 여행을 하고 있고 지금 당장에도 수만 혹은 수십만의 사람들이 훨씬 더 도전적인 여행을 하고 있을거다.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우리나라가 안전불감증과 안전결벽증이 공존하는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익숙한 바운더리 내에서는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안전불감증 정도로 안전에 대해 무뎌지는 반면 그 밖에 낯선 영역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안전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심지어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한국 지방 소도시에 대해서 “문명화 되지 않은 야만이 얼마나 위험한지”라는 식의 댓글을 쓴 것도 본 적이 있다.

우리 사회는 자신과 다른 타자를 전부 추방함으로써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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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같은 것"의 테러는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정보와 데이터를 쌓으면서도 어떤 지식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친구와 팔로워를 쌓으면서도 어떤 타자도 만나지 못한다.
타자의 부정성과 변모가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을 만들어낸다.
경험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러나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밀로서의 타자, 유혹으로서의 타자, 에로스로서의 타자, 욕망으로서의 타자, 지옥으로서의 타자,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진다.
오늘날 "타자의 부정성"은 "같은 것의 긍정성"에 밀려나고 있다.

- 한병철, 타자의 추방

어쨌든 오늘은 저 독일인과 여행에 대해서 조금 대화하다가 침대로 들어갔다.

이 사람은 2026년 3월 15일 현재도 동남아시아를 여행중이다. 인스타그램으로 소식을 간간히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