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 살이 #02: 포스트모던 가이와 함께

[동남아 자전거 여행] #49 베트남 2025.03.05 - 13

다낭 살이 #02: 포스트모던 가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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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05 - 13

친구가 다낭으로 놀러 왔다. 이름 이지웅. 세는 나이 8살에 처음 만나서(만 나이로는 7살?) 그때부터 초, 중,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이다.

키가 유독 나보다 큰 것 말고도 자라면서 발현되는 성향도 나와는 크게 차이가 났었는데 어릴 때부터 나는 이 친구를 보면서 “도대체 쟤는 왜 저렇게 행동할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예를 들어, 유독 이 친구는 어릴 때부터 감정에 많이 휘둘리고(희로애락 중 ‘노’가 없다. ‘노’가 없는 만큼 ‘희애락’이 강했다.) 여자를 밝혔었는데 그때 내 수준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었다

성품, 인격, mbti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차치하고 이 친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철학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현대 철학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건 아니고, 끽해봐야 내가 읽은 프랑스 현대철학자들, 라캉, 들뢰즈, 알랭 바디우, 지젝과 같은 학자들의 입문서의 입문서 수준의 책을, 내 수준에서 이해한 정도가 되겠다. 버트런드 러셀은 “총명한 사람의 말을 우둔한 사람이 전하게 되면 도무지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는 까닭은, 우둔한 사람은 자신이 들은 내용을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이해할 수 있게 바꾸어 말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내가 바로 그 우둔한 사람이다.

프로이트부터 시작된 일련의 현대 철학의 흐름에서는, 아주 거칠게 보면, 세상을 크게 두 층위로 나눠서 본다.(플라톤의 이데아를 거꾸로 뒤집은 것 같은 느낌도 있다.) 아래에 있는 실재계와 그것을 덮고 있는 상징계. 실제계는 마그마, 에너지, 혼돈, 공백, 무의식과 같은 것들이 있고 그 위를 법, 사회, 체계, 언어, 질서 같은 것들이 덮고 있다.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대면할 수 없고, 우리가 태양을 직접 바라볼 수 없듯이 상징계에 자리 잡은 우리들은 실재계와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때때로 이 억압된 실재계의 에너지가 상징계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대상 a, 잉여 향락, 공백의 가장자리 등으로 부른다. 우리가 사는 이 상징계의 세상에 뚫린 구멍을 통해서 실재계의 에너지가 솟아오르는데 여기서 우리는 강렬한 쾌락과 욕망, 고통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를 실재의 귀환이라고 한다.

이 친구는 이 구멍이 다른 사람보다 크다. 친구 종학이는 지웅이가 ‘쾌락에 대한 저항력이 너무 낮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나 같은 사람은 음악이나 예술작품 감상과 같은 강렬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이 내 심장에 그대로 날아들어오지 않는다. 화살은 공기저항을 받고, 외투를 거치고, 티셔츠를 뚫으면서 힘이 점차 약해지고 마침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해진다. 그러니까 마그마와 같은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것들도 사회규범, 도덕법칙, 언어, 타인의 생각과 같은 것들이 이 에너지를 약화시킨다. 끝내는 카프카의 도끼처럼 내 마음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들어도, 잘 만든 영화를 보아도, 타인의 평가와 해석을 듣기 전까지 판단을 유보하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작용을 했는지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반해 이 친구는 그런 면에서 기민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타인에 평가에도 민감해 어쩔 땐 열탕에 있던 자기 의견이 곧바로 냉탕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래서 이 친구는 언제나 줏대가 없다고 욕을 먹는다.

21살이었나 이 친구가 한창 재즈에 빠져있을 때, 어떤 재즈 음악을 듣고 오르가즘을 느꼈다고 그것에 대해 설명했는데 나는 여지껏 음악을 들으면서 그 정도로 강렬한 쾌락을 느껴본 적은 없다.

예술작품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낭에서 KFC 치킨 한 마리를 먹고,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30분 넘게 본인 나름의 치킨에 대한 ‘진리론’에 대해 떠들어 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했다. 그만하라고 한 마디 하니 곧바로 기가 죽어버렸다.

실재의 귀환은 강한 쾌락과 함께 큰 고통을 동반한다. 이것으로 이 친구가 왜 한평생을 불안하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성향 덕에 이 친구는 자꾸 질서에서 미끄러진다. 사회 규범 속으로 들어가려다가도 자꾸 발을 헛디뎌 줄곧 구멍 속으로 빠지고 마는데 기어코 체계 바깥으로 밀려나버린다. 그래서일까 지웅이는 억압과 체계가 강한 곳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

이 친구는 아직도 사랑을 믿는다. 체제에 예속되지 않고 나라는 존재를 근간부터 흔들어 무너뜨리는 그런 본질적인 사랑을 말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학생 시절부터 사랑에만 빠지면 자기 자신이 사라지고 헤어지면 언제나 자아가 가루가 되어있었다. 추측건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명령은 노도처럼 밀려들어오는 타인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이 같은 사랑일 것이다.

이 친구를 앞으로 '포스트모던가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래서 우리는 7박 8일 동안 이 다낭에서 무엇을 했나? 특별한 건 하지 않았다. 지웅이는 일을 하고 나는 책을 읽었다. 아침에 매일 똑같은 반미 아주머니에게 반미를 사서 들고 매일 가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 작업하기 좋은 다른 카페에 가서 일을 하고 독서를 한다. 저녁을 먹고 해변이나 바에 가서 간단하게 맥주를 먹은 후 하루를 마무리했다.

일요일에는 같이 교회에 갔다. 내가 여행하면서 느낀 한인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소회를 이 친구에게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건만 이 친구는 나를 의심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제육덮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한국인들과 재미있게 얘기하는 생각을 하고 교회로 갔는데 그 기대가 또다시 보기 좋게 와장창 무너졌다.형식적인 인사만 나누고 자기들끼리 밥 먹는 걸 구경하면서 또 한 번 마음이 상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한국 개신교가 말하는 이웃 사랑은 이다지도 맹목적이고 기만적이다. 자전거를 타고 오르막을 올라가면서 창문을 내리고 따봉을 날려주는 아저씨들에게서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느낀다.

[동남아 자전거 여행] #35 캄보디아 | 교회는 거지꼴의 이방인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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